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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JU IFF #3호 [인터뷰] 차이밍량 감독 X 이강생 배우 대담 “천천히 흘러가는 느린 걸음의 의미는”
최현수 사진 오계옥 2024-05-05

붉은 천을 두른 맨발의 승려가 아주 천천히 프레임을 가로지른다. 카메라는 아무런 미동 없이 수행하는 육체를 담아낸다. 차이밍량 감독이 오로지 느린 걸음만으로 이뤄진 영화, 행자 연작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영겁의 시간을 체화한 그의 페르소나 이강생 덕분이었다. 단호하고 확신에 찬 걸음으로 인터뷰장에 들어온 차이밍량 감독 뒤로 느긋하게 이강생 배우가 들어왔다. 30년을 함께 해온 두 사람은 서로의 속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행자 연작의 모든 작품을 상영하게 됐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차이밍량 꿈이 실현된 기분이다. 행자 프로젝트를 작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열 편을 완성하면 꼭 모든 작품을 한 곳에서 상영하기를 원했다. 행자는 느린 걸음으로 이어진 단순한 작품이다. 똑같은 내용처럼 보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한다면 저마다 다른 깨달음을 얻는 수행의 시간이 될 것이다.

이강생 지금까지 행자 연작은 주로 미술관에서 상영됐다. 물론 새롭고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영화관에서 이 작품을 꼭 보여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관람자가 이동하면서 작품을 선택하는 미술관보다는 온전히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영화관에서 행자 전작을 상영하게 되어 기쁘다.

- 이번 기회로 행자 연작을 처음 보는 관객들도 많다. 프로젝트를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차이밍량 원래 내 영화를 아는 관객들에게도 행자 연작은 낯설 것이다. 행자는 서사의 자리에 느리게 걷는 장면만이 남아있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관람이라는 개념 자체를 사고하는 상황을 바란다. 무엇 때문에 이 영상을 보고 있으며, 내가 응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재고해야 한다. 따라서 행자를 보는 관객들은 자유를 만끽했으면 한다. 자고 싶으면 잘 수 있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질 수 있으며, 행자가 아닌 프레임의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져도 된다.

이강생 행자를 일종의 퍼포먼스나 행위 예술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 행자는 전부 하나의 그림 혹은 하나의 책을 보는 느낌이다. 행자의 롱테이크를 경험하면서 관객들이 내면에서 떠오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 행자 연작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차이밍량 당시 10편이 넘는 장편을 만들면서 영화 제작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영화는 시나리오를 쓰고, 사람을 찾고, 일정 기간에 팀을 이뤄 촬영을 끝내야만 하는 공정이 존재한다. 이러한 시스템이 역설적으로 영화라는 창작물에 제약을 가한다. 그때 마침 이강생과 연극을 만들게 됐다. 그가 무대에 올라 매우 느리게 이동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이강생만이 할 수 있는 육체의 움직임을 영상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 차이밍량의 모든 영화는 이강생의 육체로부터 시작된다. 차이밍량으로부터 자신의 걸음을 찍겠다는 계획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이강생 내 움직임을 찍겠다는 말은 사실 너무 익숙해서 크게 놀랍지 않았다. 다만 준비하는 과정이 좋았다. 내가 입는 승복은 무게 3.5kg 길이 10m의 어떤 재단도 들어가지 않은 붉은 천이다. 이 옷을 입는 순간 특별한 결과물이 탄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밍량 이강생이 다른 천을 두른 적은 말레이시아에서 <물 위 걷기>를 촬영할 때 단 한 번 뿐이었다. 40도가 넘는 기온에 얇은 천으로 준비해서 찍었는데 이전과 같은 맛이 안 나더라. 그래서 다시 두꺼운 천으로 바꿔서 촬영했다. (웃음)

- 현장의 천축국 순례도 창작에 큰 영감을 주었다고.

차이밍량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꼽자면, 첫째는 아버지고, 둘째는 이강생이며, 마지막이 현장이다. 이강생은 내게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고, 영화에 접근하는 사유의 방식을 바꿔준 사람이다. 현장은 내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천 년 전 중국에서 인도까지 걸어서 불경을 가지고 온 사람이다. 아무 정보도 없는 시대에 오로지 자신의 걸음에 의지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관객에게 행자는 사색과 체험의 시간이다. 프레임 안에서 묵묵히 걷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이강생 많이들 궁금해하더라. (웃음) 체력과 인내력을 시험하는 시간이었다. 제일 짧은 컷이 20분이고 길면 60분에서 80분까지 묵묵히 걸어야 한다. 흡사 하프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걷다 보면 다리가 엄청나게 떨린다. 어느 순간 체력이 전부 소진이 되어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속으로 불경을 읊었다. 그 순간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주변에서 느껴지는 부산함을 잊게 된다.

- 행자 연작을 촬영하면서 <부재>, <낭인>같은 다른 작품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10년간 행자를 연기한 경험이 다른 연기에도 어떤 영향을 주었나.

이강생 행자 프로젝트 사이에 다른 제안이 들어오면 차이밍량과 가장 먼저 이야기를 나눈다. 대부분 상업적인 영화가 들어온다. 이런 작품을 연기할 때는 다시 과거의 걷는 속도로 돌아가야 한다. 행자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영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기존의 영화 작업을 거치고 나면 내가 지닌 본연의 속도가 어긋나게 된다. 그때마다 행자를 연기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원하는 영원한 예술의 세계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 <너의 얼굴>, <데이즈>부터 행자 연작까지 차이밍량의 영화는 시간과 육체를 극한으로 밀어붙인다는 인상을 준다.

차이밍량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다. 각자의 시간이 지닌 길이가 다를지언정 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따라서 인간을 이야기할 때 육체와 시간을 분리해서 말할 수 없다. 이것이 삶의 번뇌다. 우리는 이따금 고통을 잊으려 아름다운 것만 보려 하고 젊음을 잃고 늙어가는 사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고 우리는 그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나의 영화는 노쇠함으로 향하는 시간을 보여주려 한다. 누군가는 이 과정이 그저 잔혹하거나 슬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즐거움과 아름다움도 있다.

- 결국 행자 연작을 관통하는 것은 걸음이다. 두 사람에게 걷는다는 행위는 무슨 의미인가.

차이밍량 열 번째 작품의 제목인 <무소주>는 금강경에서 나온 단어로 정처가 없다는 뜻이다. 삶이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유랑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갇히거나 묶이지 않은 채 나아갈 수 있는 행위가 바로 걸음이다. 나 또한 행자를 촬영하면서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땅을 걷게 되었다.

이강생 걸음은 느리고 천천히 흘러가는 삶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작금의 세상은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너무 빠른 속도를 살고 있다. 걸음은 그 속도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든다. 설령 AI로 대표되는 기술의 속도가 세상을 지배한다 해도 나는 영원히 느린 걸음으로 살고 싶다.

- 행자 연작이 시간의 미세한 흐름을 쫓고 있다면, 이번 특별전은 두 사람이 함께한 10년의 세월의 궤적을 쫓을 수 있는 자리였다.

차이밍량 10년이 긴 건가? 짧은 건가? 모르겠다. (웃음) 촬영하는 과정이 평안했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러니까 10편을 찍을 수 있었겠지. 10년이라는 세월이 전부 이강생과 함께한 창작의 시간이었다. 촬영 시기가 명확한 보편적인 영화와 달리 이 작업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창작의 여정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행운이라고 느낀다.

이강생 이 프로젝트를 45세에 시작해서 이제 55세가 됐다. 지난 10년간 체력도 외모도 크게 변하진 않은 것 같다. 다만 55세에서 65세가 될 때까지, 65살에서 또 75살이 될 때까지 계속 행자라는 작업을 한다면 아마 그때는 변화를 훨씬 더 잘 체감할지 모르겠다. 주변에서 듣기론 지금부터 신체의 변화가 빠르게 온다고 하더라. 하지만 앞으로 걸어갈 시간이 기대된다. 아마 그때쯤 되면 체력이 아닌 정신으로 승부하는 단계가 올 것 같다. 마치 나이를 먹을수록 내공이 높아지는 기 수련자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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